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단 편집) == 가문 및 시대 배경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씨족은 당대 로마에서 유서 깊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습 귀족[* 평민 귀족(Noble Plebians) 가문들 때문에, 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원래 귀족(Patrician)은 왕정이나 공화정 초기로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 구성원들 사이에서 세습되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공화정 중기 이후 등장한 평민 귀족 가문들은 따로 귀족 신분을 부여받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기존 다수의 세습귀족들보다도 영향력이 컸고, 통혼하거나 정치적 동맹을 맺을 때도 기존 세습귀족들로부터 대등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귀족'으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평민과 세습 귀족의 구분 없이 원로원 의원직을 세습하며 정국을 주도한 가문들을 통틀어 수식 없이 '귀족'으로 부르고, 공화정 초기부터 이어진 신분으로서의 귀족은 '세습 귀족'으로 구분하여 서술했다.]가문이었다. 율리우스 씨족은 원래 [[도시국가]] 알바롱가[*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생존자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 알바롱가를 건국했으며 그 알바롱가 왕녀와 군신 마르스의 아들이 바로 초대 왕 [[로물루스]]다.]의 귀족이었다가 로마의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때 로마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 알바롱가가 로마 건국 세력의 발상지임을 감안하면, 율리우스 가문의 역사는 거의 로마 자체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한술 더 떠 마리우스의 배우자였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가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알바롱가의 개국시조 율루스이며 자신은 여신 베누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허구성 짙고 대담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도 빈축을 사지 않을[* 율리우스 씨족보다 역사가 짧고 기원이 불확실한 가문도 족보에 신들을 끌여들여 윤색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보통은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적어도 율리우스 씨족의 경우 가문의 역사가 로마 건국 이전부터 시작하는 건 확실했기 때문에 문제가 덜 된 것이다.] 정도로 유서깊은 가문임은 분명했다. 실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 중 한 명을 시조로 둔 아이밀리우스 씨족[* 누마의 후손이 아닌 알바롱가의 유서 깊은 귀족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과 칼푸르니우스 씨족[*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친정으로 피소, 비불루스를 배출했다. 이 가문은 씨족 성씨에서 드러나듯 누마의 아들 칼푸스가 시조였다.],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씨족들로 꼽히는 파비우스, 유니우스, 만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씨족, 건국 당시부터 합류해 꾸준히 평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발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씨족 정도를 제외한다면 율리우스 씨족의 역사와 맞먹을만한 로마의 세습 귀족 가문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시조 클라우수스가 자기 부족을 통째로 끌고 와서 로마의 귀족으로 편입된 이래 한번도 몰락해본 적이 없었던 굴지의 명문 클라우디우스 씨족도 율리우스 씨족에 비하면 까마득한 후배(?)였다. 당시 율리우스 씨족은 족보 하나는 끝내주기는 했어도 왕정 폐지 이후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권력 핵심에서는 밀려나게 된다. 율리우스 씨족은 내부 지파로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직계손들인 아울루스 가문을 비롯하여 리보, 카이사르 등이 있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상징하는 집안은 사실 아울루스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공화정 초기 14명 정도의 [[집정관]]과 1명의 [[독재관]]을 배출했는데, 유명한 인물로는 율리우스 가문 내 중시조 정도로 찬사받은 대정치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 기원전 489년 [[집정관]].]가 있었다. 하지만 종가 격의 아울루스 가문의 경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일찌감치 대가 끊겨 기록만 남은 상태였다. 이는 또 다른 유력 가문 리보 가문도 비슷해, 그나마 알아주는 지파는 카이사르 가문 정도만 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현저히 꺾여 있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직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 로마 공화정을 주름잡은 대명문가로는 로마 자체와 맞먹는 역사를 가진 대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배출한 파비우스 씨족,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후발 주자(?)로 로마에 귀화한 사비니 혈통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외에도 카이킬리우스나 리키니우스, 셈프로니우스, 도미티우스 씨족과 같은 평민 귀족(Noble plebeians)[* 이들은 실제 귀족 신분은 아니었고, 평민집회에 참가하고 호민관을 역임하는 등[* 클로디우스가 온 로마가 시끄러워질 스캔들을 일으켜 귀족 신분을 포기해가며 호민관이 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민중 선동을 통해 출세하려는 야심만만한 귀족에게 호민관은 매력적인 자리였다. 때문에 호민관의 존재감이 커진 뒤에는 기존 귀족들이 역차별당한다는 원성도 있을 정도였다. 카이사르가 없는 살림에 무리하면서 조영관 시절 경기대회나 연회 개최에 거액을 쓴 것은, 호민관으로 명성을 얻을 수 없던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카이사르에게는 조영관이 법무관 선거에 나오기 전 눈도장을 찍을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평민 고유의 권리도 계속 향유했다. 다만 평민임에도 기존 귀족 가문들과 대등하게 혼맥을 맺고, 기존 파트리키 가문처럼 구성원들이 고위 관직을 연달아 역임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커졌기 때문에 '평민 귀족'으로 불린 것이다.] 가문들도 이 시기에 다수 출현했다. 역사가 깊으면서도 부, 명성, 공적까지 전부 갖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나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울루스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의 명문대가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했다지만, 선두권 신귀족 가문들의 부, 명성은 늦게 원로원에 입성했음에도 율리우스 씨족은 물론이고 그보다 사정이 나았던 여러 세습 귀족 가문들을 훨씬 능가했다. 설상가상 율리우스 씨족은 로마 사회가 변화하며 대두한 신흥 평민 귀족 가문들과 경쟁할 재력도 없는 상황에서, 전 지파에 걸쳐 집정관도[* 공화정 초기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후기 공화정에서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장 전까지 BC 267년, BC 157년을 제외하고는 집정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세계 정복을 주도한 명문대가들[* 공화정 후기에는 포에니 전쟁으로 누미디아 왕가까지 피호민으로 만든 스키피오 가문, 프로빈키아(남프랑스)를 정복한 아헤노바르부스와 파비우스 가문,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쿰에서 정복 활동을 벌인 메텔루스 가문 등 전쟁을 통해 명성을 쌓은 가문들이 다수 출현했다.]은 그 결과로 막대한 재력을 쌓고,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의 호족들은 물론 왕가까지 클리엔텔라 관계로 끌어들였다. 애당초 공화정 로마에서는 출세하려면 선거에 엄청난 정치 자금을 쓰고 후원 회원도 많이 동원해야 했고, 재벌급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아니라면 고위공직을 연이어 역임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집정관도 전쟁 영웅도 배출하지 못한 율리우스 씨족은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재산과 피호민 수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며 고위공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난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카이사르의 조상들이 무능해서 율리우스 씨족이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세계 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가문의 족보와 실제 영향력이 점차 별개가 되고 신진 세력들이 대두하는 가운데 기존 세습 귀족들도 여러 분가[* 여기 해당하는 것이 코르넬리우스 씨족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고 해도 좋을 또 다른 대귀족 클라우디우스 씨족이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의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카이쿠스)''' 아피우스]]와 그의 장남(실제로는 차남)을 중시조로 둔 풀케르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로 인식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지만, 아피우스 카이쿠스의 차남(실제로는 사남) 티베리우스에서 기원한 지파인 네로 가문은 형제뻘 친척인 풀케르 가문이나 시조 아피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친척 마르켈루스 가문과 달리 전쟁 영웅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외에는 집정관을 배출하지도 못한 채 카이사르 가문처럼 [[법무관]]을 배출하면서 의석을 세습하고 있었다.네로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시기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카이사르 밑에서 해군제독, 법무관 등을 지내며 카이사르파로 활약한 이후였다. 그러나 이 역시 풀케르, 마르켈루스 가문보다 잘 나간다거나 대등한 수준은 아니었고, 네로 가문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 자체가 된 시기는 리비아 드루실라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와 그 후손들이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가문과 하나의 가문으로 결합된 시대 이후였다. 결국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는 카이사르와 네로 가문은 둘 다 때때로 등장한 몇몇 유명인들을 제외하면 공화정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귀족가문이었던 것이다.]로 나뉘면서, 가문 간 경쟁이 치열해진 당시 원로원의 분위기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유서 깊은 가문들은 이런 상황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문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다. 상호 입양과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 공통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붕당 형성은 공화국 초기부터 볼 수 있는 현상이었으나, 이제는 치열해진 귀족가문 간 경쟁으로 인해 자신의 붕당 외의 다른 가문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게[* 평소같으면 온정주의가 작동해 관대하게 처리되었을 일이나, 합의를 통해 적당히 나눠먹고 끝났을 관직 배분에서의 충돌이 점차 잦아지게 되었다.]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가문은 아예 잔반 수준으로까지 몰락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카이사르가 활동하던 시절 그가 한때 유피테르를 모시는 최고 사제 [[플라멘|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사제였으니 당연히 그 권위가 막강해 최고 제사장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는 원로원의 당연직 의원으로, [[릭토르]]를 거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 참여에 제약이 없던 최고 제사장과는 달리 플라멘 디알리스는 죽음과 관련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는데, 군 지휘가 곧 정치였던 고대 로마에서 이는 그가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과 현실정치 참여에서 배제된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였으며, 그의 사촌 섹스투스가 퀴리누스를 모시는 고위 사제 플라멘 퀴리누스(Flamen Quirinalis)가 되고 팔촌 루키우스는 조점관이었던 등 모든 가문 구성원이 국가적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에서의 율리우스 씨족의 막강한 위상은 마리우스 이후 가문의 부상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원래 고위 사제는 실권은 없을지언정 가장 폐쇄적인 공직으로 노부스 호모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았으며 플라멘 디알리스를 비롯한 몇몇 신관직은 아예 평민이 맡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세력유무야 어쨌건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 태고적부터 로마를 수호해온 신들을 모시는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여겼고, 때문에 고위 사제직은 족보만큼은 짱짱한 가문의 자제들을 뽑는게 관례였다. 고위 사제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으며, 훗날 최고 제사장 자리를 카이사르가 잘 활용했던 것처럼 종교적 휴일을 선포하는 식으로 민회나 원로원 회의 등 정치 일정을 조절[* 역법이 이들의 소관으로, 필요할 때 달력에 날수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의사일정을 지연시키거나 선거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점에 열리게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제정한 것은 역법의 불확실성을 줄여 일상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필리버스터]]로 쓰이던 역사와 전통의 꼼수를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당시 로마 역법의 폐해를 로마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기존의 역법을 고치지 않은 것은 무지보다는 그것의 유용성(...) 때문이었다.]하고, 사면권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점괘가 불길하다는 등의 이유로 민회나 원로원의 결정을 무력화하거나 반대로 그런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현대 공화정에 대입하면 헌법재판관이나 선관위원, 국회 운영위원, 가처분 판사의 역할[* 현대 공화정에서 엘리트 중심으로 구성되어,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법부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는 이렇다할 조상이 없는 지방 평민 야심가[* 물론 세계의 중심 로마를 대대로 지배해온 명문 귀족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대부분은 이들의 연고 지역에서는 유서깊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물론 공화정 말기로 갈수록 사회의 변동성이 심해지며, 아예 포로 출신에서 시작해 노새를 키우다가 카이사르군에 투신해 집정관, 군 사령관이 되어 개선식까지 치른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벤티디우스]] 같은 인물도 나타나게 된다.]가 집정관, 심지어는 개선장군과 국가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개방성이 있었고, 호민관이 민회나 평민집회에서의 입법권, 거부권 행사를 통해 원로원 결의를 뒤집으며 포풀라레스가 기세를 올리기도 하던 로마 공화정이, 근본적으로는 귀족들의 합의로 굴러가는 과두정이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견제 외에도, 폐쇄적인 고위 사제직은 가끔 등장하던 위협적인 평민 야심가를 체제에 포섭하는 역할로서 유용했다. 협력자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사투르니누스]]를 마지막 순간에 버리고 그를 진압하는 원로원파에 합류했던 [[마리우스]]나, 동방을 정복하고 돌아왔으나 전후처리나 퇴역병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 개무시로 일관하는 원로원 앞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참고 견딘 [[폼페이우스]]의 사례처럼 이들은 아쉬울 게 없어 보였음에도 원로원파와의 대결에서 때로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들은 한편으로 원로원과 대립하면서도 체제에 본격적으로 대항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일에는 계속 망설였고, 스카이볼라나 스카우루스 같은 명문가와 혼사를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쌓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번성하여 후손들이 명문귀족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들에게만 열려 있던 고위 사제나 켄소르 등의 공직까지 진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로마 귀족사회가 폐쇄적이면서도, 때로는 메텔루스 가문처럼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온전히 명문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가문이 있었기에 노부스 호모들은 언젠가는 자신들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마리우스 같은 대영웅도 진입이 불가능할 만큼 배타적인 영역이 있으면서도, 한 번 정해진 신분을 바꿀 수 없는 골품제와는 달리 때로는 유연성을 발휘했던 것이 로마 귀족사회가 오래 유지되어 온 비결이었던 것.]이다.]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랬던지라 카이사르 가문은 권력의 중심에서는 밀려난 상황에서도, 세습 귀족가문들이 고위 사제 등을 세습하며 암암리에 맡아온 국가의 종교와 전통을 수호하는 역할을 통해 권위와 신망을 유지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변화의 흐름 속에서 카이사르 가문 역시 원로원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는데, 그들이 택한 방법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결혼 상대 대신 부유하고 유능해 장래가 기대되는 신진 세력을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는 깡촌 아르피눔 출신의 듣보잡 라틴 평민으로 씨족이라는 '간판'이 없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았다. 비록 젊을 때부터 군인으로서 전도유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때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이라 군 복무가 직업이 아니라 병역 의무였던 걸 생각하면 귀천상혼으로 집안 몰락 인증했다는 소리듣기 딱 좋은 혼사였다. 그런데 이후 마리우스는 당시 귀족들의 지리멸렬한 지휘에 더해 이제는 전쟁만 터지면 몇 년 동안 교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군 생활을 하는[* 원래 로마군은 현역 해당자인 시민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병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마다 부대 구성원이 교체되어야 했으나 포에니 전쟁 이후로 해외 영토가 크게 늘고 이역만리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서 교대 시스템이 무너졌다.] 로마 평민들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별 선거 운동도 안하고 집정관 선거에 깜짝 출마해 당선되고 유구르타 전쟁을 빠른 승전으로 종결지었다. 거기에 더해 20만에 가까운 로마군을 학살하며 2차 포에니 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를 가져온 [[게르만족]]의 대침공을 신묘한 전술로 멋지게 막아내는 일까지 이루어냈다. 결국 마리우스는 건국왕 로물루스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에 이은 로마 제3의 건국자로 불리고 남들은 한두 번 지내기도 힘든 집정관직을 일곱 차례나 역임하는 위업을 세운다. 카이사르가 태어난 기원전 100년은, 개선식을 치르고 집정관을 연임하며 마리우스의 권세와 인기가 절정에 오른 시점이었다. 그의 인기와 방대한 인맥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처가라 해도 물론 공짜는 없었던지라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는 마리우스의 퇴역병 정착을 도우며 나중에 드러났듯 그들을 마리우스의 사병으로 만드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척 카이사르 가문에게도 마침내 고위직 진출의 길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는 기원전 91년 집정관, 카이사르의 칠촌당숙 루키우스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지내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역시 [[법무관]]과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나, 집정관이 되기 전, BC 85년에 사망했다.[* 미트리다테스에게 된통 당하기 전까지 로마 총독들이 아시아 속주를 마음대로 벗겨먹을 수 있는 화수분 취급했던 만큼, 카이사르의 아버지 역시 한몫 챙겼을 것이 확실하다. 다만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마리우스파였던 만큼 그 재산은 내전을 거치며 사라지거나 술라에게 몰수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이는 카이사르의 출세 전까지 그의 가족이 수부라에서 생활할 정도로 가난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이후 아시아 총독 부관으로 공직 경력을 시작해 비티니아에서 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버지가 아시아 총독을 역임해 이 지역에 연고가 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시대의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처럼 카이사르 스트라보 역시 킨나 시절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율리우스 가문 내의 가이우스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카이사르 집안 남성들은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고《황제열전》에 서술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스트라보는 병으로 사망했고, 저서 말미에 수에토니우스 스스로 자신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기술한 탓에 국내 번역서 저자들까지도 "틀렸다", "명백한 오류다" 등으로 각주를 달아 짚고 넘어가고 있다.] 거기 더해 옵티마테스였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문은 카이사르의 외삼촌 셋이 나란히 집정관을 지내면서 로마 정치를 좌우하는 핵심 명문가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한동안 집정관을 내지 못하던 카이사르 가문에서 드디어 삼촌 섹스투스와 칠촌당숙 루키우스[* 이 루키우스 분가의 출세는 사실 마리우스와 큰 관련은 없었다. 루키우스는 가장 집요하게 마리우스에 반대했던 옵티마테스파 수장 카툴루스의 이부형제로, 정치적 배경은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적 입장도 다르고 칠촌이면 거의 남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율리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까지 살아남은 후손이 매우 귀했다. 때문에 당시 율리우스 가문원은 전 로마를 통틀어 독재관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의 분가와 이 루키우스 분가 사람들이 전부였고 때문에 양쪽은 관계가 꽤나 밀접했다. 이 관계는 루키우스의 외손자로 부계후손이 끊어진 분가를 사실상 잇게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가 독재관과의 혈연관계는 9촌으로 멀었어도, 독재관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간주된 이유였다. 안토니우스의 후손들이 황족으로 온전히 인정받아, 칼리굴라 이후 로마 황통을 잇게 된 데는 이들이 루키우스로부터 이어지는 카이사르 분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가 집정관을 지냈고, 외가에서도 외삼촌 셋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법무관까지는 출세했으니 카이사르 가문은 다시 로마의 최상층에 진입한 셈이었다. 이런 든든한 가문배경은 정치를 막 시작하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가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일은 카이사르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리우스와 킨나로 이어지는 포풀라레스 정권에서 아버지 가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냈으면 그는 마리우스파 핵심인사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인 카이사르 역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술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성공이 가문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지, 카이사르 역시 출신 지역과 가문에 얽매이는 대신 개방적으로 혼맥을 맺고 인재를 기용했다. 카이사르 본인은 코르넬리아 킨나, 폼페이아 술라, 칼푸르니아처럼 명문대가 출신 배우자를 맞으면서도, 가문의 여성들은 명문 귀족 대신 성장 가능성이 있고 확고한 동맹이 돠어줄 지방 유력자와 맺어주게[* 물론 가난한 카이사르에게는 명문대가에 딸의 지참금으로 내줄만한 돈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된다. 카이사르는 [[퀸투스 페디우스]]나 아티우스 발부스 같은 지방 명문가 출신들과 혼맥을 맺고 이들을 중용한 것을 넘어, 포로와 유랑민 출신이었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벤티디우스]], 신체에 결함이 있던[* 2천년이 지난 현대인들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당시에도 장애는 공직자에게는 큰 결격사유였다. 이후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 1세]]는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이었음에도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괄시받으며 나이 50이 되도록 별다른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카이사르는 편견없이 인재를 기용했던 것.]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바티니우스]], 이탈리아 유력자는커녕 속주로 이주한 로마인의 후예조차도 아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같은 외국인[* 가데스(현재 [[카디스]])의 페니키아계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활약해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아직 이탈리아 지방도시 명문가 출신조차 운신에 제약이 있던 당시 정서를 고려하면, 외국인인 발부스는 애초에 정치는 꿈도 꿀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에게 자금 운용 능력과 정치력을 인정받아 갈리아 전쟁 내내 로마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고, 카이사르 사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한다.]까지 폭넓게 중용했다. 물론 옵티마테스 진영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린 반면, 카이사르는 정실주의 없이 능력만 고려했다는 식으로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을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옵티마테스 진영도 잠재력 있는 신진세력이 눈에 띄면 기용을 망설이지 않았고, 카이사르 역시 기존 명문귀족들을 더 우대했다. 카이사르 진영에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레피두스]]나 돌라벨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데키무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같은 명문귀족들이 즐비했고, 이들은 신진 세력보다 우선적으로 주요 관직에 기용되었다. 다만 기존 귀족들은 선을 긋고 미관말직에나 머물게 했을, 벤티디우스나 발부스 같은 무명 인사나 외국인까지도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를 맡기고 이후 집정관직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중용한 것이 큰 차이였다. 결국 이런 카이사르 의 개방성과 능력 중심의 인재 기용은 마리우스를 뛰어넘는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아그리파]]라는 두 번의 대박[* 당시에는 누가 봐도 옥타비우스[* 이후 입양되어 옥타비아누스로 불리게 된다.]보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가 더 후계자로 적합해 보였다. 물론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지만, 입양은 꼭 혈연만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안토니우스는 당시 정치인의 전성기로 간주되던 40대를 눈앞에 뒀고, 카이사르파의 2인자로서 정치적 입지도 탄탄했다. 외할머니가 카이사르의 누나였던 옥타비우스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어머니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여동생으로, 카이사르와 촌수는 멀어도 율리우스 가문과의 관계는 더 가까웠다. 감찰관 할아버지와 삼촌을 둔 안토니우스의 막강한 배경은 집정관도 배출하지 못한[* 이는 가문이 완전한 노부스 호모 신세를 벗어나, 귀족사회에 발붙이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자기 가문에서 처음으로 배출된 원로원 의원이었던 키케로가 대놓고 당한 무시와, 신참자 취급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눈물없이 볼 수 없는-- 모습을 보면 이 구분이 당대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보통 매 세대마다 집정관을 배출하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인정받았고, 메텔루스 가문처럼 귀족사회의 정점에 도달한 가문은 매 세대마다 형제, 사촌들이 돌아가며 집정관을 지냈고, 감찰관이나 최고제사장 역임자 목록에서도 가문원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옥타비우스 가문과는 애초에 비교대상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지방 유지 가문 출신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벤티디우스처럼 완전히 무명이었던 농민가정 출신의 아그리파를 인간성과 능력만 보고 그에게 붙여줬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함께 이뤄낸 놀라운 성공은,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카이사르의 인재 기용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능력을 보고 발탁한 인재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원로원 정원을 900명으로 늘리고 갈리아 부족장들까지 의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충실한 카이사르파들에게까지 반감을 사 암살당하게 된 일을 잊지 않았다. 결국 권력을 잡은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정원을 600명으로 다시 줄이고 기존 명문귀족과 이탈리아 유력자 중심으로 인재를 기용하게 된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실무 관료로는 지방의 기사계급을 꾸준히 등용하였고, 결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후반부에는 황제의 측근 역할을 하며 성장한 관료 출신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런 세력의 대표주자격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가 들어선 뒤 그는 문호를 더 개방하여 속주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결국 트라야누스의 등장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가되, 반발을 고려해 속도를 조절했던 것이다.]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가문의 입지가 부침을 겪은 데 개인의 행운[* 물론 카이사르 가문의 부흥에는 그렇게 출세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던 시절의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은 엄청난 행운--로또-- --저점매수--이 결정적이기는 했다. 사실 생전 행적을 고려하면, 처가에 대단한 도움을 줄 생각은 없던 게 분명했던 마리우스가 새로운 명문가를 여는 대신 또 다른 전쟁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심에 폭주--미친짓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하는데 그것도 최악의 복수귀 술라를 상대로-- 하다 대가 끊겨, 처조카 카이사르가 전쟁영웅의 명성, 시민들의 향수 등 그의 무형적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것은 또다른 큰 행운이었다. 물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독재관 술라의 명령에도 끝까지 버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겨 그 탈 많은 유산을 온전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카이사르의 결단력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과 불운뿐 아니라 시대상황이 크게 작용했던 만큼, 카이사르 가문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카이사르 가문처럼 한때 경쟁력을 잃고 밀려났던 세습 귀족들은 당시 로마에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술라, 카틸리나인데 이들은 원로원 의석은 유지한 카이사르 가문이 애교로 보일 만큼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진짜 명문 귀족의 후예였다. 이렇게 공화정 후기 로마 정치의 최상층부에서 밀려났던 명문귀족들 중 일부가 로마의 영역이 크게 팽창하고, 기존 명문대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정복지에서의 군사와 상업활동을 통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신진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해 로마 정치의 중심에 다시 진입하는 일도 당시에는 드물지 않았다. 돈과 영향력에 비해 부족한 가문의 족보는 늘 신진 세력의 약점이었고 익숙한 '브랜드'를 선호하는 유권자와 동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명문 귀족들과의 인척관계와 정치적 연대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척 마리우스 덕을 봤던 카이사르 가문과 마찬가지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로마 귀족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던 술라가 그런 경우였고, 본인의 혈통이 진짜 세습 귀족이기는 했어도 맨주먹으로 태어나 신진세력이나 다름없었던 술라와의 연대로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키운 카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은 고위직으로 진출할 길이 열렸을지언정 다른 가문들처럼 정치 자금을 소모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던지라, 출세의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출생지와 자택은 로마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로, 귀족들이 선호하지 않은 수부라 구역이었다. 이처럼 카이사르 가문은 지금으로 치면 재산 규모가 평범한 영세 자산가 수준인 귀족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한 조상들을 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강북의 다세대주택 밀집지역에서 나고 자란 정치인이었던 셈[* 수부라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는 저지대로, 공공건축물이 밀집한 북부와 하층민들이 살던 남부 구역이 뒤엉켜 있는 로마시 최대의 상가로서 유흥 시설과 윤락가까지 들어서 하루종일 시끄럽고 습기찬 시장통인지라 귀족이면 술라같은 몰락 잔반이 아닌 바에야 거기서 안살았다. 자고로 공화정 로마에서 귀족이라고 하면 로마시 7대 언덕 중 6개 위에 형성된 밝고 조용하고 물이 잘 빠지는 부촌의 단독 주택에서 사는게 일반적이었다. 다만 카이사르가 수부라 빈민들과 똑같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원로원 의원 신분을 감안[* 유력자와 자산가들의 대저택만큼은 아니어도, 로마 정치인의 저택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었다. 하인과 노예들의 방은 물론이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매일 의원에게 노무를 제공하러 방문하는 방대한 클리엔테스들, 이런저런 청탁을 위해 동맹국과 속주 등 지중해 세계 전체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머무르게 하고 면담할 공간도 있어야 했다.]하면 그의 자택은 수부라에서는 나름 괜찮은 '주상복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로원 입성을 위한 재산 자격은 1백만 세르테르티우스 이상이었고, 하루 몇 세르테르티우스 정도의 일당으로 먹고살던 서민들 눈에는 어떤 원로원 의원이든 대단한 자산가였다. 경제력이 서민 수준으로 떨어졌다면 한때의 술라 가문처럼 원로원에서도 진작 밀려났을 것이고, 다만 부촌에 입주할 재력은 없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대 정치인들도 일부러 --눈 씻고 찾아도 없는--서민적 배경을 내세우려 애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런 특이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팔라티노에 살며 그들끼리만 교류하는 명문가 귀족들과는 달리,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고귀한 혈통의 카이사르가 수부라로 흘러들어온 온갖 배경의 주민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데다 정치경력을 쌓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호감을 샀던 것이다.]이다. 더욱이 원로원 의원은 플라미니우스 법에 따라 상공업과 임대업도 할 수 없었던지라, 건국 이래 대대로 귀족이었던 카이사르 가문은 지방에서 은행업을 통해 중견기업 정도 규모의 재산을 일군 옥타비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버지]같은 신참 원로원 의원 집안보다도 재산이 현저히 적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큰 빚을 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계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공직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 있었고, 때문에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공공 사업을 벌이고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다. 따라서 혼맥과 인맥 덕에 출세에 도움이 될 연줄과 인지도가 있었음에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카이사르의 정치 경력은 거의 끝장날 뻔했다. 크라수스와 같은 유력한 사업가들의 보증이 아니었으면, 비슷한 처지였던 카틸리나처럼 빚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리우스와의 연대로 카이사르 가문의 출세길이 다시 열리기는 했어도, 바로 그 이유로 카이사르 가문은 당시 로마를 장악한 옵티마테스 고위 귀족들과 온전히 한 편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씨족 이름조차 없는 그야말로 촌구석의 듣보잡 평민으로서 원로원 의석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귀족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마리우스의 붕당은 민중파, 혹은 포풀라레스로 불리게 된다.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혈통으로는 옵티마테스[* 직역하면 최고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엘리트주의]]를 내세운 귀족파를 뜻하는 말.]에 속해 마땅했으나, 공화정 로마의 부유한 명문 귀족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마리우스와 포풀라레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실제로 마리우스는 자신을 공격한 원로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카이사르의 칠촌당숙인 BC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기도 했을 정도로 마리우스에 대한 카이사르 가문 내부의 스탠스는 복잡했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뒤를 이어 포풀라레스 정권의 수장이 된 킨나의 딸과 결혼하면서,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가 되며 마리우스파와의 연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또한 카이사르 가문은 [[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일부 사가는 이 율리아가 카이사르의 칠촌 당숙 루키우스의 여자 형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 소설《로마의 일인자》등을 집필한 콜린 매컬로는 이 율리아를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의 여자 형제로 설정했으나,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동서지간으로 만들고 카이사르를 마리우스와 술라 양쪽과 엮어 이야기 진행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단순한 창작이다. 다만 술라가 초기 마리우스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것은, 율리우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제기해볼 수 있다.] 마리우스의 처가로서 마리우스 붕당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카이사르 가문이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술라와의 인척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술라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폼페이아를 낳았는데, 이후 그녀는 카이사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숙적이었던 옵티마테스의 대표 주자 술라파와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로마 귀족들은 이념에 따라 붕당을 형성하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 친족이나 보호자에 대한 의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를 '민중파'와 '귀족파'라는 고정된 붕당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시각이다.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 견제에 쏠쏠하게 써먹었던 호민관 클로디우스만 해도 원래 당시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는데 민중파 활동을 위해 스스로 귀족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된 케이스이다.] 카이사르 가문이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점은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계만 봐도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은 비록 성향이 온건하긴 했지만 엄연히 옵티마테스의 중진으로 간주되었고 덕분에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척들 중에서 [[카틸리나 탄핵]] 때 같이 엮여서 옵티마테스 쪽에 완전히 찍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카이사르의 부관 노릇을 한 안토니우스 정도만 제외하면 거의 다 옵티마테스 쪽 인사들이었다. 그 정도로 카이사르는 가문만 보면 완벽한 귀족 자제였다. 그나마도 루키우스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이건 반역이라며 반발했을 정도.] 다만 코타 가문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처럼 원로원의 특권만을 앞세우는 강경한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아니었고,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루키우스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배심원 역할을 [[기사계급]]과 함께 수행하는 법률을 입안하기도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라는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술라의 숙청 이후에도 마리우스는 서민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민중의 편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술라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마리우스의 친족들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은 인척은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카이사르뿐이었고, 거기에 킨나의 사위임을 내세워 그는 젊은 나이부터 포풀라레스 붕당의 영수가 된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 쪽과 전부 밀접하고, 고귀하지만 부침을 겪은 가문 출신으로서 빈민가에서 경력을 시작한 카이사르의 특별한 배경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행적과 성공의 비결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이런 배경 덕에 정치 입문 시점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건국까지 올라가는 유서깊은 세습 귀족으로서 그들이 독점하던 특권을 온전히 향유하면서도, 포풀라레스 붕당의 수장으로서 평민과 기사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양쪽의 이점을 전부 취할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카이사르는 법무관도 지내기 전에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낸 원로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삼두연합을 맺을 수 있었다. 삼두연합을 통해 권력을 얻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 같은 평민 야심가들과는 달리 명문귀족들의 인정을 갈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대대로 물려받았고 최고 제사장이 되며 더 강화된 종교적 권능까지 이용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런 추진력으로 그는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이나마 이루고, 갈리아 전쟁을 통해 얻은 막강한 무력과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옵티마테스 붕당을 해체해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열 수 있는 기반[* 물론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개혁을 예상했다거나, 제정 로마 수립을 의도했다고까지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을 닦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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